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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와 고구려 유민

이집트 전성기 맘루크 왕조 창시자는 고구려 유민 후손 용병

14세기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의 부흥을 일으킨 왕조이다. 창시자는 놀랍게도 한국의 조상인 고구려 유민 출신의 용병이다. 노예 신분이었던 용병들이 이집트인의 신임을 얻어 왕조까지 세웠다. 과거 이슬람 세계에서는 노예 제도과 폭넓게 인정되어 능력이 있으면 신분 상승이 일어났다.

1. 이집트 맘루크 왕조 창시자는 고구려 유민

이집트는 알렉산더대왕의 침입과 로마제국 침입을 받았고 614년 아랍 세력의 침공으로 이슬람으로 편입되었다.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뿐 아니라 14세기 맘루크 왕조때에도 전성기를 누렸다. 

맘루크 왕조. medievalists.net

맘루크 왕조 당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동서 무역 중개로 풍요로웠고 인구가 50만이나 되는 대도시였다. 넘치는 재정 덕분에 도시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에게 무료 숙식을 제공했다. 

 현재도 이집트인들은 찬란했던 맘루크 시대의 번영을 기억하고 있다. 맘루크는 아랍어로 노예라는 뜻이다. 군인 노예가 세운 왕조이다. 13세기부터 이집트 역사는 특이하게 전개된다. 아시아 기마군단이 이집트에 들어왔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노예 제도과 폭넓게 인정되었다. 

 가사 노예와 군인 노예가 활용되었다. 군인 노예들 중에 투르크인들이 용병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전투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받아 사회의 상층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았는데 몽골의 대칸 몽케의 동생 훌라구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있던 바그다드에 이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점령했다. 

 이어 이집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맘루크의 술탄 쿠트즈와 군사령과 바이바르스가 전쟁을 택했다. 갈릴리 동쪽 아인 잘루트 대전투에서 맘루크 군은 몽골군을 섬멸하고 이집트를 구했다.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아인 잘루트 전투의 주인공인 ‘쿠트즈’와 ‘바이바르스’ 장군이 모두 고주몽의 후예인 오구즈칸 가계의 일원이라고 한다. 

 오구즈칸 일족은 고구려 멸망 후 서쪽으로 가서 호라즘 제국을 건설했고 그 일부 세력이 이집트 용병이 되었다가 후에 맘루크 왕조를 건설하게 되었다.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9570

http://gnpnews.org/archives/143056?ckattempt=1

 맘루크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번영하다가 오스만 제국에 패했다. 기마 전단인 오스만 제국의 왕가 역시 또 다른 계보의 고구려 후손 오구즈칸의 후예라고 한다. 

2. 문명사에서 이집트의 위치와 세계 모든 정복자들이 탐낸 이집트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 건너가 세운 왕조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맘루크 라는 뜻이 이집트어로 노예의 뜻이다. 고구려 유민이 노예 용병으로 이집트까지 갔다가 왕조를 세운 것이다.

맘루크 창시자의 외모를 지금의 한국인으로 상상하면 무리이다. 고구려 명망 후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과 서역을 거쳐 유랑하다가 혼혈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한국은 이렇게 고대로부터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는 선사시대부터 유래한 다신론 종교에 기독교까지 전래되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고 지역의 수호신들이 차차 국가의 보편적인 신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이집트의 주 종교는 이슬람이다. 이집트를 한자 음차로 콥트라고 부른다. 이집트는 히브리 지역과 가까운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초기 기독교의 전파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집트에 신앙심이 깊은 콥트 기독교인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9년 3월 이집트의 도시 알렉사드리아에서 발굴한 카타콤(= 카타콤브, 카타콤베)이 공개되었다. 1900년에 우연히 마차가 구멍에 빠지면서 지하 묘지가 드러났다. 

 카타콤(Catacomb)은 라틴어이고 무덤들 가운데(=among the tombs)라는 뜻이로 대규모 지하묘지이다. 원래는 로마 주변에 있던 지하묘지를 뜻했는데 그후 의미가 확장되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시설물을 가리킨다. 

 카타콤에서 장례풍습은 동굴이나 지하 갱도 벽에 수평으로 벽을 파서(=벽관) 시체를 안치한뒤 벽돌이나 석회로 밀폐하는 방법이다. 로마에서 발견된 카타콤만해도 50여 개이다. 

 알렉산드리아 카타콤은 현지어인 아랍어로 ‘콤 엘 쇼카파(Kom El Shuqafa)’라는 명칭이 있다. 토기파편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문화에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 및 복식 양식이 합쳐져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카타콤은 기독교인들이 만든 것은 아니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 카타콤은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하던 2천년 전에 만들어졌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위시한 국제 고대유물 복원기관들이 이 무덤을 복구한 후에 이집트 정부가 일반인에게도 공개했다. 카타콤은 서울 명동성당에도 있고 파리에도 까따꽁브라는 이름으로 있다. 

 역사상 많은 제국의 정복자들이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이집트를 정복하고자 했다. 페르시아 제국(이란의 조상)과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 인), 로마제국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집트는 지중해의 아래쪽에 위치해서 이집트를 정복하면 지중해 지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오스만 튀르크가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도 이집트를 정복한 뒤였다. 나폴레옹도 유럽의 맹주가 되기 전에 이집트 원정부터 나섰다.

3. 이집트 혁명과 한국 516혁명

 이집트혁명. 1952년 이집트 청년 장교들이 나세르 장군을 중심으로 자유장교단을 결성해 군주제를 폐지하고자 군사혁명을 단행했다. 그리고 농업국가에서 벗어나 토지개혁과 산업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빈곤율이 낮아지고 빈부격차도 개선되는 성과를 보였다. 김종필 전 총리가 이집트 혁명이 5·16의 모델이었다고 술회했다. 5·16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나아졌는지는 역사가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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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전성기를 이룬 14세기 맘루크 왕조는 고구려 유민이 세웠다. 맘르크 단어 자체가 이집트어로 노예, 용병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군인들이 서역을 넘어 이집트까지 가서 용병으로 일하다가 이집트인의 신임을 얻어 왕조까지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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