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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

19세기까지 비료와 미국 죄수 식사였던 랍스터의 고급화

랍스터는 미국에서는 19세기까지 비료와 죄수의 식사였다. 미국 해안에서 흔하게 잡히는 랍스터의 조리법을 몰라서 맛이 없어서다. 반면 유럽은 튀기고 굽는 조리법이라 귀족들의 고급 음식이었고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식 조리법이 정착되고 신선도를 위해 산 채로 수송 보관해서 고급화가 정립됐다.

19세기까지 미국 죄수들 식사였던 랍스터

랍스터 뿐만 아니라 새우나 게 등 갑각류는 ‘바다의 곤충’이라 불릴 정도로 벌레를 닮았다. 그래서 맛을 알기 전까지는 징그럽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근대까지만 해도 애용되지 않았다. 

랍스터. University of Maine

 미국의 랍스터 주요 생산지 가운데 한 주인 메사추세츠주에서는 18세기, 법으로 재소자의 바닷가재 급식 횟수를 제한할 정도였다. 주 2회 이상 재소자에게 랍스터를 먹이는 조치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당시에는 맛이 없어서라니. 히야~

https://www.history.com/news/a-taste-of-lobster-history

미국에 이주민이 몰려오던 초기 개척 시절 미국에도 식량이 모자랐다. 농장 일꾼으로 취직한 가난한 이주민들과 노예들은 항상 배고팠다. 그런 그들에게 농장주들은 이렇게 말했다. “빵이 없으니 랍스터(바닷가재)를 먹세나.” 지금 들으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소리다. 하지만 사실이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를 태우고 영국을 떠난 메이플라워호가 미국에 도착한 곳이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Plymouth)이다. 빵보다 못한 가난의 상징 ‘랍스터! 너무 흔해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랍스터를 먹지않고 밭의 비료로 사용했다. 

 조리 방법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오븐에 굽거나, 슬쩍 데치기만 하거나, 쪄내지만, 이때에는 그냥 물에 넣고 푹 삶아 먹었다. 국물은 버리고 살만 발라 먹었는데 맛있는 아미노산이 국물에 그대로 쓸려가니 당연히 맛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16~ 17세기유럽 귀족의 고급품 랍스터

 빵 대신에 먹어야 했던 랍스터’가 우아한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미국 전역으로 랍스터가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예전부터 랍스터를 고급 요리로 즐겨 먹었다. 

 1세기 무렵 로마에서 발간된 요리책에는 랍스터 조리법과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소개한 기록이 있다. 15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곳곳에서 랍스터 요리법에 관한 문헌이 발견된다.

 16~17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바닷가재가 왕족과 귀족이 즐겨 먹는 고급품이었다. 일부 유럽 지역에서는 사랑의 묘약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미국과 달리 프랑스 요리의 특성상 삶지 않고, 굽거나 튀기거나 향료로 쪄서 먹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식 고급 조리법 정착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고급 요리사들이 1840년대 각지로 퍼져 나가 프랑스식 조리법이 정착하여 지금의 고급 음식 취급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식뿐 아니라 이탈리아식에서도 고급 요리 재료다.

랍스터. Chef Jean Pierre

거기에 수송, 보존이 힘들어 그날 직접 살아있는 채로 공수해와야 해서 재료 단가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해산물 전반이 다 고급 취급이었는데 랍스터가 가장 고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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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안에 널려 있는 랍스터는 일반인들은 먹지 않고 비료로 쓰이고 죄수들의 식사로 제공됐다. 조리법이 물에 푹 삶는 방법이라 맛이 없어서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굽고 튀기는 방법이어서 귀족들의 고급 식자재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식 조리법이 보급되고 재료의 신선도를 위해 산 채로 운반 보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랍스터는 고급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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