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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만개한 유교 퇴계의 인성과 막대한 처가 덕은 조선 중기 아들딸 재산 균등분배 덕분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아들딸 재산 균등분배였다. 아들딸 차별과 재산 장남 몰아주기는 임진왜란 이후 시작되었다. 임란 후 전국토가 피폐해져서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황은 아들딸 재산 균등분배의 혜택을 봤다.

2021년 10월 1일에 퇴계종가 후손들이 퇴계의 위패를 불태웠다. 후손이 직접 조상의 위폐를 없애는 일은 유교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퇴계는 정신지체 여자와 재혼해서 잘 보듬어 주었고 둘째 며느리를 재가시킨 분이다. 그 조상의 그 후손이다.

“서원에 위패를 모셔놓고 서로 갈등이 조장되면 오히려 안 모시는 것만 못합니다. 우리 후손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모아서 다시 이런 논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위폐를 철폐했습니다.” 

1. 한중일 유교(오로지 한국에서만 만개)

한중일 유교

유학(유교)의 본고장은 중국이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공맹이 죽어야 중국이 선다는 격심한 운동이 있었다. 공자 맹자의 유학이 중국의 발전에 방해물이 되었다는 자각때문이었다. 

 일본에도 유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둘다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조선에서는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 성리학)이 조선후기 국가 통치의 기틀이 되어 조직적으로 방방곡곡에 퍼졌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304420_34936.html

 한국 반만년 역사에서 유교는 불과 300~400년을 차지하나 불과 최근까지도 영향력이 막강했다. 성리학은 영남과 호남으로 학파가 나뉘어 자신의 스승이 더 훌륭하다며 길에서 마주쳤다하면 서로 언쟁을 일삼았다. 기어이 상투잡고 몸싸움까지 번졌다. 

유림이 남녀평등 법제화 방해

 딸아들 유산균등분배, 호주제폐지, 딸도 대잇기 등의 남녀평등을 법제화하려고 할 때마다 방해했다. 두루마기 입은 유림들이 흰수염을 휘날리며 청와대로 대법원으로 떼로 몰려왔다.

 그리고 죽음을 모릅쓰고 읍소를 했다. 그렇게 단식투쟁하며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바람에 번번이 법개정이 미뤄졌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초중기만 해도 남녀가 평등

 특히 유산상속은 철저하게 딸아들 균등분배였다. 퇴계 생존시 당시에도 그랬다. 외가의 유산이 외손에게까지 전해졌고 처가살이도 흔했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도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강릉 오죽헌이 외할아버지의 집이었다.

 퇴계는 막내아들이었는데도 종가라니. 첫째 아들이 아니래도 문중을 열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딸도 대를 잇도록 한국 가족법이 바뀌었다. 딸도 자기 성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고 하고 싶으면 새로운 문중을 열고 족보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퇴계의 도산서원
퇴계의 도산서원. 엄청 넓은 부지위에 저택

2. 성리학자 퇴계 이황 

조선의 성리학

 이황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라는 뜻은 물러날 퇴, 시냇물 계로 관직을 떠나 한적한 고향에서 은둔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는 유학의 여러 파 중에서도 주희의 주자학(= 성리학자)로 유명했다.

 그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딱딱하고 유통성없는 성리학에서 정작 이황은 실생활에서 매우 인간적이었으니 의문과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황( 1501~1570)의 출생과 당시 서구

 조선시대 1502년 음력 1월 3일 안동 도산면에서 듣보잡 한미한 진성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당시 영국은 그 유명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였고 유럽은 구교 천주교와 신교 개신교 갈등이 시작되었고 동유럽은 이슬람 오스만 제국이 있었다.

이황의 어머니는 후처

 이황의 어머니는 자식이 매우 많이 딸린 홀아비와 혼인해서 자식을 하나 낳았다. 그렇게 막내로 태어난 이가 이황이다.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만에 아버지 이 식이 40살에 별세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으로 전처 자식을 포함해서 8남매를 먹이고 혼인시켜야 했다.

이황의 배다른 형제들과  어린 이황의 남다른 도량

 퇴계는 위로 배다른 형이 6명, 누나가 한 명 있었다. 퇴계가 태어났을 때 이미 큰형은 장가를 갔다. 퇴계가 어릴 때, 형이 칼을 가지고 놀다가 손을 베어 피를 흘렸다. 이에 정작 형은 가만히 있는데 이황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른들이 물었다.

“손 다친 녀석은 태연한데 멀쩡한 네가 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형이 칼에 베여서 얼마나 아플까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파요.”

 남의 처지를 잘 살피는 도량이 남다른 어린 아이들이 있다. 소공자 소공녀의 세드릭과 세라가 대표적이다. 단지 명작 소설의 가공인물로만 생각했는데 드물지만 실제한다.

 한국에는 퇴계가 그러한 예였다. 어릴 때 나의 남동생과 조카딸이 그러한 면이 있어서 깜짝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사춘기 전에 이미 대범한 면이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퇴계 첫 혼인과 사별, 두번째 부인 출산도중 사망

 퇴계 본인은 동갑인 첫부인과 22살에 결혼했는데 둘째 아들을 낳자마자 사별을 겪었다. 부인의 삼년상을 치루고 나중에 31세에 재가를 했을 때 부인이 정신지체로 모자란 사람이었고 출산도중에 죽었다.

둘째 아들 요절, 증손자 아사, 형 사약, 퇴계 본인도 낙향

 장성한 둘째 아들도 결혼후 요절했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증손자도 어릴 때 영양실조로 죽게 됐다. 중종반정 이후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퇴계의 형 온계를 죽게 했고, 퇴계도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퇴계의 의연함

 퇴계는 개인적인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 그런 일들을 핑계 삼지도 않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과 손자에게 꾸준히 보낸 편지들은 더할 수 없는 배려와 자애의 말로 가득차 있다.

 퇴계는 둘째 아들 채가 태어난지 한달만에 아내가 죽었다. 퇴계는 삼년상을 치렀고 여전히 장인 장모께 극진했다. 채는 경상도 의령의 외가에서 키웠는데 워낙 몸이 약했다.

퇴계의 과부 둘째 며느리

 채가 결혼하고 곧 죽어서 퇴계의 둘째 며느리는 자식도 없이 평생 혼자 살게 되었다. 당시는 여자의 재혼이 허가되지 않았다. 며느리가 걱정되어 매일밤 별당을 돌면서 살펴보곤 했다.

 어느 날 며느리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며느리가 누군가와 정답게 얘기하고 있었다. 깊은 밤에 며느리가 외간 남자를 불러들인 것일까.

 퇴계가 창호지 틈으로 조심히 살펴보니 며느리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에 둘째 아들의 옷을 입혀 놓고 술상을 차려서 그 인형과 마주앉아 산 사람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보, 한잔 드세요.”

 며느리는 한참 동안 남편 인형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놀다가 갑자기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밤 퇴계는 마음이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초중기만 해도 여자의 재가를 막지 않는 남녀평등한 시대였다. 퇴계가 살던 당시에도 유산은 아들딸 균등 분배였다. 부모가 죽었을 경우, 외할아버지의 유산이 외손에게까지 할당되었다.

퇴계의 각성과 둘째 며느리에 대한 배려

 윤리와 도덕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퇴계는 계책을 냈다. 며칠 뒤 퇴계는 사돈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며느리를 친정에 보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퇴계가 한양까지 먼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 날이 저물었다. 우연히 하룻밤 묵을 곳이 있어 신세를 졌다. 인심이 후한 젊은 집주인 남자가 아내를 불러 식사를 차려 오게 했다.

 음식 하나하나가 모두 퇴계의 입맛에 딱 맞고 퇴계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다음날 길을 나서려는데 집주인이 아내가 밤새 지었다며 버선 한켤레를 선물했다.

 신어보니 너무나 편안하고 꼭 맞아서 예전에 둘째 며느리가 지어주던 버선이 생각났으나 그냥 지나쳤다. 퇴계가 주인과 작별하고 길을 떠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담 모퉁이에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배웅하는 여인이 있었다. 한눈에 둘째 며느리임을 알 수 있었다. 행여 재혼한 며느리의 결혼 생활에 방해가 될까봐 퇴계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는데 마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퇴계가 정신지체자와 재혼하다

 퇴계는 검약과 절제로 무척 가난하였다. 그러다 31세에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부인이 친정에서 한 재산을 가지고 왔다. 친정아버지인 안동 권씨 권 질이 정신지체인 딸을 돌봐줄 이로 퇴계를 점 찍어두었다. 마침 퇴계가 상처하자 간곡하게 부탁하며 후처로 보낸 것이다.

“퇴계 자네가 아니면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딸을 맡길 사람이 없네”

 권질의 딸은 어릴 때 집안에서 겪은 사화로 인해 숙부가 사약을 받아 자살하고 아버지가 귀양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정신이 혼미해졌고 회복이 안되었다.

퇴계 후처로 인한 경제적 혜택

 후처로 온 이분은 집안 제사날에 젯상에 올린 음식을 집어먹었다. 이러저러한 어리숙한 행동에도 퇴계는 난처해 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잘 타이르고 감싸주었다. 

 퇴계 자신의 벌이로는 집한채 살 수 없었다. 그러나 퇴계의 외가와 전처, 후처 가문이 모두 안동지역을 대표하던 명문사족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산을 나눈 과정을 기록한 분재기를 남겼다.

 퇴계 아들의 분재기(分財記)에 의하면 땅은 36만평, 노비는 360여 명이었다. 퇴계의 첫 장인인 허찬 역시 처가살이를 했고 처가에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 가운데 일부가 딸에게 상속되었고 결국 남편인 퇴계에게로 넘어왔다. 

 무엇보다 후처가 혼인 당시 친정의 재산을 많이 가져왔다. 이것이 퇴계가 돈 걱정없이 관직에 안나가도 학문에 매진하게된 기틀이 되었다. 퇴계자신은 검약했지만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실학자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산 증식에 굉장한 노력을 하였다.

3. 한국 역사에서 아들딸 차별의 시작은 임진왜란 직후

임란후 사회유지를 위해 성리학 다시 득세

조선 중기만 해도 처가집에서 기꺼이 처가살이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의 인구가 삼분의 일로 줄자 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그래서 재산을 아들딸에게 균등분배하지 않고 큰아들에게만 물려주어 재산이 흩어지지 않게 했다. 재산은 나누면 줄어 줄고 재산을 키우려면 덩어리가 커야 덩어리를 더 쉽게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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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후처의 몸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부친에 대한 이렇다할 기억도 없다. 결혼했더니 부인은 애낳고 죽었다. 손자는 먹을 게 없어서 죽고 형은 사약을 받았다. 권세가의 정신지체 여자와 재혼했더니 애를 낳다가 애와 함께 죽었다.

 퇴계 이황은 여러 가지 극심한 불행 속에서도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아들딸 며느리 손주를 보살폈다. 그리고 매우 가난해 봤기에 가족들 더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처가에서 굴러들어온 재산을 잘 관리하고 황무지까지 개간했다. 재혼를 막던 시대에 며느리를 재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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