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유의 우수한 종이 천년 한지는 오랫동안 국가산업으로 끊임없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변하지 않고 보존이 쉬운 질 좋은 종이를 완성했다. 일본 화지를 대체해 루브르 등 세계 3대 박물관과 이탈리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복원 용지로 한지를 채택하고 있다.
1. 종이의 어원과 천년 한지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종이의 탄생은 학문 발전과 지식 전달 수단으로 인류에게 문명의 진보를 이루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인류의 문화 발달과 문화 형성에 핵심적 공헌을 하였다.
그 중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보존이 쉬운 질 좋은 종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문자의 발명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어 온 국가적이며 범세계적 사업이었다. 우수한 우리 고유의 한지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되었다.
한국 종이 한지는 수명이 천년이다. 종이라는 어원은 닥나무 껍질인 저피에 어원을 두고 저피->조비->조해->종이로 변했다. 여기에서 종이는 한지의 의미와 가깝다.
그러고 보니 이 코로나 시대의 서구에서 사재기 현상의 중심에 있던 화장지가 종이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랍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국인 로렌스가 딱 하나 빼고 아랍문화에 동화되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화장지이다.
아랍의 모래는 과장을 쬐금 보태면 비단처럼 아주 고운 입자이다. 아랍인은 큰 볼일 보고 모래로 뒷처리를 하는데 로렌스는 그렇게 못하고 영국에서 공수해온 화장지를 꼭 이용해야 했다.
천년 한지. 종이접기 예술가나 나처럼 취미가 종이접기인 사람도 종이가 소중하다. 책관련 산업도 종이가 필요하다. 저술가들도 읽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우리 한국은 수 천년이 지나도 까딱없는 보존성이 우수한 한지가 있다.
중국을 포함한 세계의 그 어느 나라도 이 기술을 따라올 수가 없다. 전세계에서 소장가치가 있어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기록이 있으면 한지를 쓰라고 강권하고 싶다.
2. 종이의 기원으로 보는 한국 한지의 기원과 우수성
종이의 기원에 대해 중국이 큰 소리 내고 있지만, 최근 실증적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그 이전에 제작된 종이와 그 유사한 형태의 것이 한국, 중국에서 차례로 발굴되고 검증되어 채륜의 종이 발명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새로운 기록과 유적이 출토될 때마다 중국은 매우 기뻐하다가 새로운 고대유적이 한국이나 몽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면 발굴을 중단하고 묻어버린다.
요하문명과 피라미드까지 보유한 홍산 문화 유적이 그렇다. 홍산 문화 유적은 신석기 고대한국인의 문화로 거대 피라미드까지 있다. 세계 4대문명보다 더 앞선 문명이다.
태국이 무에타이를 태국 고유의 것이라 자랑했는데 캄보디아가 발끈하고 있다. 이차세계 대전를 종식한 것은 영국의 암호학자 앨런 튜닝이 당시 독일의 전투지령을 암호로 전달하는 에니그마를 해독해서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사람보다 더 먼저 폴란드의 암호학자가 나치의 초기 애니그마를 이미 풀었고 영국의 앨런 튜링이 이에 힌트를 얻어 더 복잡해진 애니그마를 풀었다는 것이다.
유전자 DNA의 나선구조 존재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여성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1958)이다.
그녀는 DNA 이중나선 구조에 가장 먼저 다가간 과학자였지만 이 연구성과를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가로채서 노벨상까지 받았다.
중국은 모든 것이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먼저 생각해 놓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걸 힌트로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다. 만들어 내도 기록을 안하거나 특허를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공을 채간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기록된 문서를 바탕으로 사실을 검토하는 것이기에. 그 옛날 일어난 일을 글로 적어놓았다고 다 사실인가. 최소한 일말의 사실을 유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중요한 아이디어를 세계곳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생각해 내기도 한다. 원조라는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려면 관점을 바꿀 수 밖에 없다.
누가 먼저 생각해 냈고 누가 먼저 만들어 냈냐보다는 실전에서 실생활에서 누가 실질적으로 더 발전시켰는가가 관건이다.
서양에서는 바다이름을 두고 싸우지 않는다. 멕시코만은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있다.
미국인은 거기에 멕시코 이름을 붙이는 것에 이의가 없다. 반면에 일본과 한국은 같은 바다를 두고 동해로 표기할 것이냐 일본해로 할 것이냐로 여전히 옥신각신한다.
세계해도에서 일본해로 되어 있던 걸 구명운동해서 동해로 표기한 엉뚱한 불똥이 독도표기에 튀었다. 세계권에서 독도는 독도였는데 일본명으로도 표기하게 된 나쁜 계기가 되었다. 바다 이름보다는 독도 한국명이 훨씬 이득이다.
닥나무 열매는 저실(楮實)이라 부르고 빨간색이며 피부미백효능이 있다. 한지는 닥나무껍질과 닥풀로 만들어진다. 닥나무는 한국에서는 단단하게 자라는 반면 중국이나 열대 지방에서는 무르게 자라서 효용이 떨어진다. 한지는 이미 중국에서 신라지, 고려지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한지 설화가 있다. 신라시대에 지금의 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 뒷산 국사봉에 대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설씨’성을 가진 주지승이 살고 있었다. 이 절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 봄날 우연히 닥나무껍질을 흐르는 냇물에 담가 두더니 껍질이 물에 풀리면서 삼베 올처럼 섬유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손으로 주물러서 바위 위에 건져 놓았더니 종이와 같은 물체가 만들어져, 이것을 계속하여 종이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절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의령현 토산조) 그리고 같은 구전설화가 의령의 향우지인 『의령향우』에도 정리되어 있다.
최초의 음표와 음계 그리고 피아노의 전신은 기독교 로마 카톨릭의 수사들에 의해서였다.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도 카톨릭 수사였다. 불교는 이렇게 한국에서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종교들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한지장은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제작 기술이 발달했었다. 고려시대에도 그 명성이 중국에서 높았다. 중국에서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조선시대 종이는 종류가 다양하며, 나뭇결이 생기고 식물섬유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지(韓紙))]
한지의 우수성을 설명할 때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고 한다. 이 말은 종이는 천년을 견디지만 비단은 오백년을 견딘다는 의미다. 또한 물과 햇빛, 닥 섬유와 닥풀, 흘림뜨기 초지기술과 도침, 천연잿물에 타서 고해 등은 한지의 친환경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특히 중국의 걸러뜨는 방식과 달리 외발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뜨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희고 광택이 있으며 질긴 종이를 생산, 수출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인접 지역에까지 널리 우리나라의 종이가 알려져 천하제일로 여겨졌다.
한지는 예로부터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색깔이나 크기, 생산지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구분은 재료 · 만드는 방법 · 쓰임새 · 크기에 따라 나누어졌으며, 이에 따른 종이의 종류는 대략 200여종에 이르렀다.
3. 세계적인 문화유산 복원에 쓰이는 우리 한지
1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전주한지의 우수성이 다시한번 검증됐다. 갈라진 캔버스를 정면에서 고정시키는 데 한지가 사용된다.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66815
이탈리아의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는 2016년 과 2018년 한지가 종이로 만든 문화재 복원에 매우 탁월하다며 자국의 문화재 5점을 한지를 이용해 복원했다. 루브르박물관에서도 문화재 복원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문경과 전주의 한지제조공장을 견학했다. 중국 일본도 비슷한 전통종이를 생산하지만 한지가 훨씬 강하고 질기며 오래간다는 것이 이들 박물관 측의 평가이다. 내구성과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가지므로 보존과 복원 분야에 사용이 적합하다.
이탈리아 문화재 보존복원 분야에서 절대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화지(和紙)를 전주한지로 대체해 나갈 수 있음은 물론, 이탈리아 바티칸, 영국 대영, 프랑스 루브르 등 유럽3대 박물관의 예술품과 미술품, 고서 같은 문화재 보존·복원 시장에서 판로를 확대 하는 등 더욱 활발하게 활용될 것이다.
특히 전주 한지가 이탈리아 문화재 복원을 넘어 세계 문화재 보존·복원분야의 동력을 키움으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는 발판도 마련되었다.
전주 한지는 그간 강도, 치수안정성, 상대적 투명도에서 굉장히 섬세해 문화재 보존·복원에 적합하다고 인정받아 왔다. 시는 이 같은 한지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산업화, 세계화하기 위해 ▲재외공관 한스타일 공간연출사업 ▲전주산 닥나무 수매사업 ▲전통한지 생산시설 조성사업 ▲전통한지 아카이브 구축사업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대표적으로 전주 한지는 2016년 ‘1333년 바티칸시국이 고려에 보낸 서신’을 복본하고 2017년에는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바이에른 막시밀리앙 2세 책상’을 복원하는 데 사용됐다.
시는 또 같은 해에 ‘1904년 고종황제와 바티칸 교황 간 친서’를 전주한지로 복본화해 바티칸 교황청에 전달하기도 했다.
2020년 11월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복원실 관계자와 세계적 종이관련 학자 등이 전주를 방문해 전통한지 생산과정을 견학했다. 올 2월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전시와 보존·복원 총책임자들이 전주한지를 직접 만지고 체험하는 등 한지의 우수성을 확인했다.
전주 한지가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지류 전문기관으로부터 유효성 인증서를 획득 함에 따라 우수성을 인정받고 세계적인 복원용지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됐다. 유튜브에 Painting restoration으로 검색하면 복원과정을 볼 수 있다.
4.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동양의 종이가 이슬람권을 거쳐 유럽에 전파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전투를 통해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제지업자들을 포로로 잡으면서부터 대마(大麻)와 아마(亞麻)를 재료로 한 최초의 종이가 이슬람권에서 생산된다.
이 “사마르칸트의 종이”는 삽시간에 유명해져 이 지방을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부흥시켰다. “아라비안나이트”라고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에 나오는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Harun al Rashid)가 다스리던 786년에서 809년 사이 바그다드(Baghdad)에 제지공장이 처음 세워졌다.
편의상 채륜을 최초 종이개발자로 칭한다. 여튼 2세기 초 채륜이 초지법을 완성한 이래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종이의 생산술과 이용법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또한 불교와 함께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로 종이의 기술을 전파되어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종이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종이의 제조법이 서양으로 전파된 것은 8세기 중엽이다.
중국은 실크로드 무역을 통하여 서방으로 종이를 수출하고 있었으나 그 제조법은 철저히 비밀로 하였다. 제지법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것은 751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슬람 사라센 제국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당나라가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지방의 탈라스강 유역에서 충돌함으로써 비롯된다.
이 전쟁이 바로 동서양의 문화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탈라스강의 전투이다. 이 전쟁을 통한 동양문화의 영향은 유럽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지술 또한 많은 당나라 전쟁포로 속에 포함된 제지공에 의해 제조법이 알려지게 된다. 중국제지공들이 “한국에는 더 진보한 기술로 더 좋은 종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라센에게 정보 제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종이 제조 방법은 8세기에 이르기까지 1천년 동안 동북 아시아의 기술로서만 사용되었다. 종이는 비단길을 이동하던 상인들에 의해 중요하게 거래되던 상품이었다.
6세기부터는 중동의 제국들이 상당한 양의 종이를 소비했다고 하는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왕이 보낸 답장이 아직 전해지고 있다. 알라를 단일신으로하는 이슬람교는 동쪽으로는 인도의 인더스(Indus)강에서 서쪽으로는 스페인의 피레네(Pyrenees)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운영한다.
이슬람 제국의 지식인들을 통해 당시에 최고의 지식 문화를 아우르며 대집성했다. 천문학자들 연금술사 등의 과학자들, 시인, 학자들을 후원해 바그다드 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바그다드에서 종이 제조 기술은 8세기 경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대체하고 중국의 사마르칸트 종이보다 더 좋은 품질로 생산된다. 그리고 10세기와 12세기 사이에 북아프리카 파티마 왕조의 치세 기간에 종이 제조가 발달했다.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에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칠리아까지 영역을 지배했다. 이때부터 이슬람권의 모든 공식 문서는 종이로 작성되었다.
이슬람의 종이가 유럽으로 전파. 유럽에서는 중세의 교역을 주도하던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아랍의 종이를 수입해 유럽에 판매하여 훌륭한 수업원으로 삼았다. 그후 13세기 중반인 1276년에 이탈리아 중부 내륙의 파브리아노(Fabriano)라는 작은 마을에서 제지 공장이 세워진 기록이 있다.
파브리아노가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일어난 기술 혁신 때문이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식물이나 넝마 조각 찧던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수력을 사용한 기술을 적용하여 수직으로 나무 망치가 내려 치도록 개발되었다. 유럽인은 계량화되고 기계화하는 걸 좋아하고 이것에 능하다.
독일에는 1336년 뉘른베르크(Nürnberg)에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1450년경 인쇄기가 발명되자 종이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영국에는 1498년에 제지공장이 세워졌으며, 미국에는 1690년에 네덜란드인에 의하여 제지공장이 설립되었다.
1798년에 프랑스의 니콜라스 루이스 로베르(N. L. Robert)가 최초의 초지기를 만들었다. 1809년에 존 디킨슨이 최초의 원압제지기를 발명했다. 19세기초에 이르러 나무와 다른 식물성 펄프가 종이제조를 위한 주요 섬유공급원으로 사용되면서 넝마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1840년 독일의 F.G.케라에 의해서 목재를 분쇄하여 펄프를 만드는 방법이 발명되고 1867년 미국의 화학자 B.C.티르만이 화학적으로 안정된 처리법을 개발함으로써 목재펄프가 완성된다.
목재펄프의 발명에 따라 종이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고 그 뒤 개량을 거듭하여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생산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보통 양지(洋紙)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종이는 이 목재 펄프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급속하게 발달한 인쇄 기술과 설비가 빠르고 간편하게 인쇄할 수 있는 종이와 만나면서 유럽에서 전성기를 맞은 제지공장들의 성장은 르네상스와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산업적 대혁명이라는 지구문명의 수레바퀴를 굴렸다.
5. 종이길과 한지의 명성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종이길이 사마르칸트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를 거쳐 유렵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열린 종이길이 일본으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종이길은 문화, 상업, 지식의 중심부에서 발생하여 문화, 상업, 지식이 확산되고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새로운 종이길을 만들어졌다.
우리 민족은 중국과는 비슷하면서도 독특하게 발달된 종이 제작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서기 105년 중국 후한때 채륜 등이 종이를 개량한 시기와 비슷하게 우리 나라에서도 나름 대로의 창조적인 기술개량을 통해 종이생산에 힘써왔다.
신라시대에 이미 중국에 희고 곱게 다듬은 종이가 수출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 수공업의 전문화와 인쇄술 · 제지술이 발달 하면서 더욱 질 좋은 종이를 중국에 수출했다.
우리나라 한지는 고려시대에도 그 명성이 높았다. 중국에서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또한 송나라의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그 사실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고구려 승려인 담징(曇徵)은 610년 우리의 우수한 종이 제지술을 일본에 전해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0년(751년)에 간행된 불경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이다.
이 다라니경은 한 장당 폭이 약 5.3cm인 종이 12장을 이어붙여 길이가 6m30cm에 달하며, 한 장당 39~63항으로 인쇄한 권자본(卷子本: 두루마리 형태)이다.
또한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연자방아 등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있다.
또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4년 추정)과 755년(경덕왕 14)에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나타난 한지자료이다.
특히, 대방광불화엄경 발문에 적혀 있는 종이 만드는 기술과 제작처의 지명 그리고 지작인(紙作人) 등은 우리 나라 한지의 역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단서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이는 770년의 일본 백만 다라니와 868년의 중국 돈황천불동 보다 우리가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목판인쇄술과 함께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한지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대장경조판과 각종 서적의 간행에 따른 종이의 수요가 확대되자 농가에서 닥나무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종이를 생산하던 지소(紙所)와 조지부곡(造紙部曲)을 두어 국가의 한지 수요를 뒷받침 하고 있었다. 한지 수요와 생산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15∼16세기이다.
한지는 내구성이 매우 강해 천 년 이상 된 고문서들도 굉장히 좋은 보존 상태로 발굴되고 있다. 당장 현존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역시 700년대의 것이나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그보다 오래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같은 다른 신라시대 고문서들도 최근 출토되고 있다.
특히 다른 종이보다 습도와 물에 굉장히 강해서 이미 쓴 내용이 필요없어지거나 더러워지면 물로 씻어 글씨나 얼룩을 지우고 그걸 햇볕에 말려서 다시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여러 겹을 겹치고 옻칠을 하면 가죽처럼 단단하고 질겨서 그릇 등 생활용품이나 심지어 갑옷까지 만들 수 있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지갑(紙甲)은 화살과 총알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한지는 산성을 띠는 서양 종이와는 다르게 중성을 띠고 있어서 변색에도 매우 강하다. 한국 주택의 필수요소인 장판도 원래는 한지에 콩기름을 바른 것이 전통적인 형태였다.
한지의 단점은 아무래도 바로 가성비이다.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서 비싸다. 일반종이 즉 양지의 효율성은 따라가기 힘들다. 조선시대에 한지를 물로 씻어 말린 다음 재사용하는 관습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제조 공정상 섬유가 균일하게 퍼져 있지 않은 특징이 있다. 색이 있는 한지의 경우는 채 염색되지 않은 흰색 섬유가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건 이거대로 디자인적인 면에서 차별화되기에 단점이 곧 장점이다.
우리 선조들은 중국이 종이 재료로 마, 죽순 등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리그닌(Lignin)과 홀로 셀룰로오스(holo-cellulose) 성분이 이상적으로 함유되어 있는 닥나무(Broussonetia kazinoki)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천연 재료인 잿물과 닥풀(황촉규) 등을 사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천년 이상 오래가는 중성지인 한지를 만들었다.
중국종이는 멧돌을 이용해서 갈아서 섬유소의 길이가 짧은 반면 한국 종이는 셀룰로오스로 만들어서 섬유소의 길이가 길다. 일본의 화지 뜨는 방법은 손잡이가 두개 달린 발로 하는 쌍발뜨기인 반면 한국종이는 외발뜨기이다. 외발뜨기가 쌍발뜨기보다 내구성이 크다.
한지의 효능으로는
먼지나 냄새를 빨아 들인다.
공기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뛰어난 효과가 있다.
인체에 유해한 자외선을 차단하여 피부를 보호한다.
한지를 통하여 들어온 빛은 눈에 부드럽다.
빼어난 흡수성과 발산성을 지닌다.
자연환경 정화에 도움을 준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강하고 끈기있는 성질은 온화하게 만든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준다.
천연 재료에 염료의 배합에 따라 부드럽고 차분함을 준다
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 껍질과 닥풀(황촉규)이고 한지를 만드는 방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일반적으로는 다음의 순서를 따른다.
①닥나무 채취 ②닥나무 껍질 벗기기 ③닥나무 껍질 삶기 ④닥나무 껍질 씻기 ⑤닥나무 껍질 두드리기 ⑥닥나무 껍질에 닥풀 풀기 ⑦한지 뜨기 ⑧한지 말리기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조상들은 한지의 여러 특성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한지는 바람과 추위를 잘 막아주어 방을 따뜻하게 해 주기 때문에 방 안의 벽에는 물론 방문이나 창문에 한지를 발라 창호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때 한지는 햇빛이 은은하게 스며들게 하고, 방 안의 습도도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
늦은 가을에 닥나무의 뿌리 위를 조금 남겨놓고 자른다. 이것이 원재료이다. 지역에 따라 한겨울이 문턱에 이르는 11월 무렵, 양지 바른 산기슭에 곧게 자란 1년생 닥나무를 벤다.
벤 닥나무를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한지장의 손길이 거쳐야 종이 한 장이 된다. 그래서 한지 만드는데 100번의 공정을 거친다고 해서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혹은 물에 정성스레 씻고 티를 골라낸 닥나무의 흰 속살로 섬유를 만들었다고 해서 백지‘(白紙)’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지장 장용훈(사진출처:문화재청)
이처럼 다양하게 생산된 종이는 주로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한 용도로 가장 많이 소비되었고 일반 민중속에서는 다양한 공예 기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다양한 용도의 생활 용품과 장식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로도 활용되었다.
한지응용 첨단제품 응용분야로는 한지나노섬유, 바이오 한지셔츠, 두루마리 디스플레이, 한지 일회용 휴대폰, 스피커기능 포함한 한지스크린, 과일숙성에 따라 변하는 한지 스티커, 바이오 센서, 한지 반도체, 인공피부 등의 응용 가능 영역이 있다.
이탈리아 문화재청과 루브르 박물관 등의 세계적인 박물관들은 문화유산을 복원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작업에 그간 일본의 전통종이인 화지가 쓰였다. 화지 따위를 능가하는 우수한 한국 종이 천년 한지가 쓰이기 시작했다.